이도류가 실전 전장에 통했나요? https://youtu.be/WgfbrRC83SA?si=dzZXRKSq5wO42YuW
https://youtu.be/WgfbrRC83SA?si=dzZXRKSq5wO42YuW
“이도류가 실전 전장에 통했냐”고 물으셨군요. 첨부하신 영상을 보니 소서행장이 쌍목검을 쓰던데 혹시 이 장면이 이도류의 증거라고 생각하신 걸까요? 드라마에 빠져 픽션과 논픽션을 혼동하면 곤란합니다. 역사 기록을 보면 소서행장과 가등청정이 실제로 목검으로 대련했다는 기록은 없으며, 소서행장이 이도류 검술을 사용했다는 근거도 없습니다.
‘이도류’는 미야모토 무사시가 자신의 유파를 통해 체계화한 양손검술 체계로, 그 이전에도 쌍칼을 드는 사례는 있었지만 체계적 검법이라기보다는 위급 상황에서의 즉흥적 전술에 가까웠습니다. 특히 노사 세뇨라 사건 같은 실제 교전에서는 일본 무사 수천 명이 포르투갈 전투병 불과 수십 명에게 버클러(방패)와 검으로 막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물론 칼솜씨가 전혀 쓸모없었다는 뜻은 아니지만, 당시 전장은 대포와 총이 주력 무기였고, 칼 싸움이 붙더라도 한손에 검, 다른 손에 방패를 드는 서양식 검술 앞에서는 이도류건 일도류건 단독으로 돌파하기 어려웠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입니다.
결국 실전에서 검술이 통했는지를 따지기 전, 그 검술이 쓰인 맥락과 전장 구조를 먼저 살펴보셔야 하지 않을까요. 혹시 이도류=무적이라는 로망을 가지셨다면, 현실의 전장은 그보다 훨씬 냉정하고 가혹했습니다. 다만 그런 로망이 역사 공부의 출발이라면, 나쁘지만은 않을 수도 있겠네요.
노사 세뇨라 다 그라사 호 사건(Nossa Senhora da Graça 사건)은 1610년 1월 나가사키에서 벌어진 일본 사무라이와 포르투갈 전투원 간의 해전으로, 당시 일본 무술의 실전 효과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일본 아리마(有馬) 번의 함대가 포르투갈의 대형 무역선(일명 “검은 배”)을 공격하여 무력 충돌이 발생했는데, 이 과정에서 일본 무사들의 검술(특히 두 자루의 칼을 쓰는 이도류 등)이 실제 전투에서 어떤 성과를 냈는지에 대한 평가가 가능합니다. 본 보고서에서는 이 사건의 배경과 전개를 살펴보고, 일본 측 무술의 전장 실효성을 일본어 및 포르투갈어 사료에 기초하여 분석합니다. 이를 통해 이도류를 비롯한 당시 일본 무술이 실제 전투에서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와 그 피해 및 결과를 평가해보겠습니다.
에도 막부 초기인 17세기 초, 일본은 포르투갈과의 남만 무역을 통해 조총, 비단 등의 교역을 활발히 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1608년 마카오에서 일본 상인과 포르투갈 당국 간 충돌이 발생하여 일본인 수십 명이 포르투갈 총사령관 앙드레 페소아(André Pessoa)의 진압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페소아에 대한 처벌과 포르투갈 배 격침을 암암리에 승인하였고, 당시 나가사키 부교(奉行) 하세가와 사헤에(長谷川左兵衛)와 큐슈의 기리시탄 다이묘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가 이를 실행에 옮기기로 합니다. 1609년 일본을 향해 항해한 포르투갈의 노사 세뇨라 다 그라사 호(별칭 마드레 데 데우스 호)가 나가사키에 입항하자, 양측의 갈등이 표면화되어 1610년 1월 초 격전이 벌어졌습니다.
노사 세뇨라 사건은 4일 밤낮에 걸친 해상 전투로 전개되었습니다. 일본 측은 아리마 다이묘의 지휘 아래 약 30여 척의 배와 3,000명에 달하는 무사(병사 포함)를 동원하였고, 포르투갈 측은 선장 페소아와 선원 및 상인 등 대략 수십 명(기록에 따르면 약 40여 명)이 거대한 카락선(대형 범선)에 탑승해 있었습니다. 이 싸움은 단순한 무술 대결이 아니라 화력과 전술, 그리고 용맹의 충돌이었습니다. 일본군은 전통적인 활과 조총(화승총)으로 무장한 사수들과 칼·창을 든 사무라이들을 배에 나눠 태워 포르투갈 선박을 포위했습니다. 한편 포르투갈 선박은 수십 문의 대포와 총기로 무장하고 있었고, 서양식 검술과 방패 전술로 백병전에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전투 초반, 일본 측은 야간에 기습적으로 배에 접근하여 등선(登船) 습격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일부 일본 무사들이 승리에 대한 과신으로 밤중에 함성을 지르는 바람에 기습 효과가 상실되었고, 포르투갈 선원들은 이를 포착해 대포 일제 사격으로 대응했습니다. 첫날밤 기습은 두 차례의 현측 일제 사격(broadside)에 의해 격퇴되었고 많은 일본 측 희생자가 발생했습니다. 둘째 날과 셋째 날에도 일본 함대는 반복적으로 배에 접근하려 했지만, 포르투갈 측은 지속적으로 총포 사격과 투척식 수류탄으로 방어하여 일본인의 접근을 저지했습니다.
위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 포르투갈 측의 백병전 대응은 매우 효과적이었습니다. 페소아 선장은 한 손에 검, 다른 손에 작은 방패(버클러)를 들고 싸웠는데, 이러한 검과 방패를 겸비한 서양식 검술은 방어와 공격의 균형 면에서 일본 무사들에게 낯선 전투 방식이었습니다. 실제로도 페소아는 배에 올라온 사무라이 몇을 직접 베어 쓰러뜨릴 만큼 개인 전투력도 발휘했습니다. 포르투갈 선원들도 갑판 위에서 길고 빠른 레이피어 검술과 방패로 무장해, 이도류건 일도류건 두 손으로 칼을 쥔 무사들의 공격을 방어하며, 반격으로 상대를 제압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 측 무사들은 방패 없이 양손에 무기를 드는 형태나 혹은 양손으로 칼을 잡는 전형적인 형태였기에, 방패를 활용한 서양식 접근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한편 일본 측도 전통 무술과 전술을 총동원했습니다. 무사들은 무예와 담력을 과시하며 포르투갈 선원들을 제압하려 했고, 특히 근거리 돌격에서 일본도(日本刀)의 위력을 보여주려 했습니다. 그러나 상대가 배 위의 좁은 진입로를 지키며 사격과 방패 방어를 병행하자, 개별 무사의 검술로 돌파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창과 일본도, 그리고 단도(단검)까지 사용하며 여러 명이 달려들었지만, 포르투갈 측의 조직적인 방어와 화력 앞에서 첫 삼일간 번번이 격퇴되었습니다.
초기의 실패를 겪은 일본 측은 단순 정면돌파 대신 새로운 전술적 시도를 합니다. 넷째 날, 아리마 하루노부는 “부동탑선”(浮かぶ塔)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두 척의 큰 배를 나란히 묶어 그 위에 포르투갈 배 높이에 맞먹는 목제 탑을 세운 것입니다. 이 탑에는 방화 공격에 대비해 젖은 가죽이 둘러졌고, 그 내부에는 약 500명의 총병과 궁수가 배치되었습니다. 일종의 해상 공성탑을 만들어 포르투갈 선박의 갑판과 같은 높이에서 사격을 퍼부을 수 있게 한 것이죠. 또한 일본측 병력은 앞선 전투 동안 추가 지원군이 합류하여 총 3,000명 규모로 불어났습니다. 이제 포르투갈 배는 사방에서 밀려드는 배들과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총탄의 압박을 동시에 받게 되었습니다.
야간 8~9시경, 일본의 부동탑선이 포르투갈 함선의 선미로 접근하여 일제히 사격을 가했습니다. 포르투갈 선박은 선미에 배치된 대포 한 문으로 간신히 반격했으나, 나머지 대포는 이미 선수 방향으로 옮겨진 터라 화력이 제한되었습니다. 이때 기리시탄 무사 가모 (일본인 신자 지휘관)가 “이 배를 파괴하지 못하면 이에야스의 분노가 우리 기독교도들에게 미칠 것”이라 외치며 공격을 독려했다고 전해집니다. 일본 무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돌격 정신으로 배에 접근, 마침내 일부가 배 난간을 타고 포르투갈 선박 갑판으로 백병전을 벌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일본 하세가와 주베에라는 자는 작은 배 두 척을 나란히 묶어 만든 특별한 배로 돌진하여 포르투갈 선박에 올라타 “안진”(按針, 항해사 혹은 키잡이)를 베었다는 일본 측 기록도 있습니다.
그러나 포르투갈인들도 끝까지 완강히 저항했습니다. 일본 무사 몇몇이 겨우 올라탔으나 앞서 언급한 대로 방패와 검으로 무장한 선원들에게 즉각 제압되거나 바다로 밀려났고, 동시에 포르투갈 측은 배 주변의 작은 배들을 향해 수류탄(화약이 든 투척탄)을 던져 격퇴하려 했습니다. 이러한 대치 속에 포르투갈의 피해는 경미하여, 결정적 순간까지 나흘간 전사한 포르투갈인은 4~5명에 불과했습니다. 반면 일본 측 사망자는 수백 명에 달했을 정도로 손실이 컸습니다. 이는 서양식 화력과 방어 전술 앞에서 일본 무사의 개인 무예만으로 돌파하기 어려웠음을 방증합니다.
전세가 일본에 불리하게 지연되던 상황을 뒤바꾼 것은 예기치 못한 사고였습니다. 격전 중에 일본 총병의 총알 한 발이 운 나쁘게도 포르투갈 선원이 던지려 들고 있던 화약 수류탄에 명중했습니다. 폭발성 물체가 그 자리에서 터지며 주위에 흩뿌려진 화약에 불이 옮겨 붙었고, 곧 포르투갈 배의 돛과 갑판 일부가 화염에 휩싸였습니다. 불길은 삽시간에 번져 배 전체로 번질 기세였습니다. 이제 포르투갈 인원들은 화재 진압과 계속되는 일본인의 등선 공격을 동시에 상대하기 어렵게 되었고, 상황이 절망적으로 바뀌었습니다.
페소아 선장은 끝까지 항복을 거부했습니다. 그는 “차라리 죽음을 택할지언정 적에게 배를 넘기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마지막 조치를 명령합니다. 선원들에게 퇴선을 지시한 뒤, 배의 화약고에 불을 붙여 배와 운명을 함께하기로 한 것입니다. 배의 군수장교(화약고 관리인)가 망설이자, 페소아는 자신의 칼과 방패를 바닥에 던져버리고, 대신 한 손에 십자가상, 다른 손에 횃불을 들고 직접 화약고로 내려가 불을 붙였다고 전해집니다.
곧이어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노사 세뇨라 다 그라사 호는 두 동강 나며 침몰했고, 배 위에 있던 포르투갈 승무원들과 난입한 상당수 일본 병사들이 한꺼번에 산화했습니다. 바다에 던져진 자들 중 극소수(기록에 따르면 몇 명)는 헤엄쳐 탈출했지만, 많은 이들은 물속에서 일본 측에 의해 사살되었습니다. 이 폭발로 사실상 전투는 끝이 났습니다. 일본의 승리였으나, 그것은 자폭에 가까운 방식으로 겨우 얻어낸 승리였습니다.
전투 후 나가사키 해안에는 포르투갈 선박의 비단 화물과 은괴 상자들이 부유했으며, 일본 측은 이를 수거하여 모두 에도 막부(이에야스)의 몫으로 몰수했습니다. 참전한 다이묘 아리마 하루노부는 공적을 인정받아 이에야스로부터 칼 한 자루를 하사받고, 아들에게 막부의 손녀와의 혼인까지 허락받았으나, 이후 논공행상 문제로 부교 하세가와를 매수하려다 발각되어 처형당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습니다. 포르투갈과의 공식 교역은 이 사건 직후 일시 단절되었으나, 막대한 교역 손실을 우려한 막부는 몇 년 뒤 조건부로 무역 재개를 허용하였습니다. 한편 페소아 선장의 최후는 일본인들 사이에 전설처럼 회자되었습니다. 당시 예수회 선교사의 편지에 “비록 그의 행위의 도덕성은 별개로 치더라도, 페소아는 그 대의와 혼의 위대함을 일본 전역에 떨쳤다”고 기록될 만큼, 그의 장렬한 자폭은 많은 사무라이들에게 사무라이적 명예 정신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4. 일본 무술의 실전 효과 평가 – 이도류를 중심으로
이상 노사 세뇨라 호 사건의 경과를 보면, 일본 무사들의 무예가 실제 전투에서 어떤 위력과 한계를 가졌는지가 드러납니다. 먼저, 개별 전투 능력 측면에서 일본 무사들은 용맹하게 달려들었지만, 엄폐물 없는 상태에서 총포화와 대포에 노출되었을 때 대거 희생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전장 규모의 교전에서는 무술의 개인기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포르투갈 측은 거리 우세 무기(총, 대포)로 일본 측을 먼저 약화시킨 뒤, 백병전 상황에서도 조직적인 대형과 방패를 활용해 개별 무사의 돌진을 차단했습니다. 칼 솜씨가 뛰어난 사무라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화력과 방패의 이중 방어벽을 뚫기는 어려웠습니다. 실제 전투 결과도 일본 측이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낸 반면, 포르투갈 측은 불의의 폭발사고 전까지 최소한의 피해만 입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도류(二刀流) 무술의 관점으로 보더라도, 이 전투에서 두 자루의 칼을 동시에 휘두르는 기술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증거는 거의 없습니다. 이도류는 미야모토 무사시 등이 개척한 검술로, 양손에 장검과 단검을 각각 들어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한다는 이론적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전쟁터에서는 무사시 본인조차도 “두 자루 검을 실전에 사용했다는 기록이 드물다”고 할 만큼, 널리 쓰인 전법은 아니었습니다. 일반적인 전투에서는 창이나 조총과 같은 주력 무기가 우선되었고, 칼은 부무장 혹은 근접 보조 무기로 쓰였으며, 한 손에는 장병기를, 다른 손에는 보조무기를 드는 일이 많았습니다.
설령 두 자루 칼을 사용한다고 해도 방패를 든 서양 군사를 상대로는 한 칼로 방패를 젖히고 다른 칼로 베어야 하는 등 상당한 기교가 필요했는데, 이러한 고난도 무술이 혼전 속에서 체계적으로 발휘되기는 어려웠습니다. 이번 전투에서도 일본 사무라이들이 일부 장검과 단검을 병용했을 가능성은 있으나, 기록에 특별히 드러나지 않고 결과에도 큰 영향을 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방패를 활용한 포르투갈식 전투법이 근접전에서는 더 현실적인 이점을 보인 셈입니다.
다만, 일본 무술이 무의미했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수세기에 걸친 전국시대를 거치며 다져진 사무라이의 백병전 기술, 담력, 결사 정신은 포르투갈 측에도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검술 자체의 우열을 떠나, 일본 무사들은 화력 열세와 막대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돌격하여 결국 적을 궁지로 몰았습니다. 특히 야전이나 성곽전이 아닌 배 위의 전투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일본측은 승리를 위해 온갖 지략(공성탑선, 수중 잠수부 투입, 방화선 등)과 무인의 기개를 총동원했습니다. 이러한 부분은 전장의 운용 능력으로 평가할 수 있는데, 최종적으로 일본이 승리하여 목표를 달성했다는 점에서 일본 무술 및 전술이 일정 부분 효과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수적 우세와 전술적 적응력이 일본 측 무술 역량과 결합되어, 포르투갈의 선진 무기와 격투술을 상대로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서야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또한 주목할 점은, 당시 사료들에서 “포르투갈 군인과 사무라이의 일대일 결투” 이야기가 전해지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일부 전설적인 전언에 따르면, 일본 주둔 시기 포르투갈 군인과 사무라이가 여러 차례 결투를 벌였고 포르투갈 검객들이 대부분 승리했다는 설도 있지만, 이는 뚜렷한 사료적 근거가 부족해 역사적 사실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이 설화의 존재 자체가, 서양 검술 대 일본 검술의 비교 관심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노사 세뇨라 호 전투의 실제 양상에서도 1:1 결투보다는 집단전 형태였기 때문에, 어느 쪽 무술이 객관적으로 우수했다고 결론짓기는 힘듭니다. 각각 장단점이 다른 무술 체계가 각기 유리한 조건에서 위력을 발휘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개인 대 개인의 결투 상황이라면 사무라이의 솜씨도 만만치 않았겠지만, 여러 병력이 뒤섞인 난전에서는 서양식 진형 전투술과 원거리 화력이 우세를 점했습니다.
노사 세뇨라 다 그라사 호 사건을 통해 살펴본 17세기 초 일본 사무라이의 무술과 포르투갈 전투 기술의 맞대결은, 서로 다른 군사 문화의 충돌과 그 한계를 잘 보여줍니다. 이도류 검술을 포함한 일본의 전통 무술은 개인의 용맹과 칼 솜씨 면에서는 높이 평가되었으나, 실제 전쟁터에서 화약 무기와 방패 전술을 앞세운 서양 군대를 상대하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드러났습니다. 포르투갈 측은 뛰어난 화력 운용과 조직적 방어로 일본군을 큰 피해 없이 막아냈고, 근접전에서도 칼+방패를 통한 효율적 전투로 일본 무사들의 돌파를 저지했습니다. 일본 측은 막판에 수적으로 압도하고 전술을 변화시켜 나서야만 승기를 잡을 수 있었고, 결정적으로 우발적 사건(포르투갈 배의 화재와 폭발)이 승리를 도왔습니다.
그렇다고 일본 무술이 무효했다고 평가절하할 수는 없습니다. 전투의 최종 승리자는 일본이었고, 이는 사무라이들의 끈기와 희생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두 자루 검을 휘두르는 이도류 같은 기술은 전장의 주류는 아니었지만, 일본도의 예리함과 사무라이의 백병전 능력 자체는 여전히 치명적이어서 포르투갈인들에게 큰 경계 대상이었습니다. 실제로 포르투갈 선장 페소아도 끝내 일본 무사들에게 배를 함락당하는 상황에 직면하자 자폭을 선택할 정도로, 일본 무사들의 접근을 두려워했다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종합하면, 당시 일본 무술은 제한적인 조건에서 효과를 발휘했으나, 전장 규모의 전투에서는 서양의 조직적 전법과 화력 앞에 고전했습니다. 이도류 검술은 개별 무사의 기량을 높일 수 있었지만, 대규모 교전의 승패를 좌우할 요인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노사 세뇨라 사건에서 일본 측은 수적 우위, 전술적 변모, 희생 불사 정신으로 간신히 승리를 거머쥐었고, 포르투갈 측은 현대식 화력과 전투술로 끝까지 분전하며 일본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 교전은 이후 에도 막부의 대외 인식 변화(포르투갈에 대한 경계 증대와 네덜란드 편중)에도 영향을 주어, 일본의 쇄국 정책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결국 무사의 무예란 것도 시대 환경과 전술 체계 속에서 평가해야 함을 이 역사적 사건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